종교적 정체성과 다문화 사회의 공존 가능성: 차이를 넘어 함께 살아가는 길
세계화와 이주 확산으로 다양한 민족, 언어, 종교가 공존하는 다문화 사회가 형성되고 있다. 이 속에서 종교적 정체성은 긍정적 에너지로 작용할 수도 있고, 갈등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본 글에서는 종교가 다문화 사회에서 어떤 방식으로 공존 가능한지를 정체성과 포용성의 관점에서 살펴본다.
다름이 공존하는 사회, 종교는 어떻게 자리를 잡을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늘 개인의 정체성을 규정해 왔다. 그 정체성의 중심에는 **종교적 신념**이 깊이 자리 잡고 있는 경우가 많다. 종교는 단순한 신앙을 넘어 삶의 방식, 언어, 의례, 윤리, 공동체 문화를 규정하는 힘을 갖고 있으며, 개인의 정체성과 공동체의 소속감을 만들어주는 **핵심적인 정체성 자원**으로 작용해 왔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점점 더 다문화·다종교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 국경은 낮아지고, 이주는 흔해졌으며, 단일 민족·단일 신념 체계라는 전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한 교실, 한 직장, 한 동네 안에도 서로 다른 신념과 문화가 공존하는 사회 속에서, 종교적 정체성은 때로 자긍심의 원천이 되지만, 때로는 벽과 충돌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 글에서는 종교적 정체성이 현대 다문화 사회에서 어떤 도전과 기회를 맞이하고 있으며, 공존과 협력의 가능성을 어떻게 열어갈 수 있는지를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한다.
종교 정체성과 다문화 사회의 긴장과 접점
다문화 사회에서 종교는 다음과 같은 이중적 역할을 한다. 하나는 **정체성 강화의 기제로서의 긍정적 기능**, 다른 하나는 **배타성과 경계 짓기의 가능성**이다. 1. 종교는 정체성 유지의 핵심 요소다 이주민, 난민, 다문화 가정에게 종교는 낯선 환경 속에서 자아 정체성을 유지하고 심리적 안정감을 제공하는 중요한 자원이다. 이슬람 이주민에게 할랄 식품, 기도 시간, 금요 예배는 단지 신앙 행위가 아니라 문화와 삶의 연속성 확보의 수단이다. 한국 내 다문화 가정의 필리핀 가톨릭 이민자들이 모이는 성당, 조계종의 베트남 불자 공동체 등은 종교를 통해 공동체를 재구성하고 있다. 2. 종교는 때로 공존의 벽이 되기도 한다 복장, 식생활, 예배 방식, 성역할 등에서 종교적 관습은 때때로 주류 사회의 가치와 충돌을 빚는다. 예) 프랑스에서의 히잡 착용 문제, 영국의 시크교 터번 학교 문제, 한국 내 라마단 기간 식단 조정 이슈 등은 종교의 표현의 자유와 공공 규범 간의 갈등을 드러낸다. 이로 인해 종교는 “그들만의 문화”로 인식되어 사회적 거리감과 편견을 확대할 수 있다. 3. 공존 가능한 접점의 형성 사례 문화 간 교육과 종교 간 이해 증진 프로그램은 종교 간 소통을 위한 유의미한 실천이다. 예)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의 청소년 종교 이해 캠프, 서울시의 종교 간 명절 체험 행사 등 공공기관과 종교 단체의 협력 모델은 사회 서비스 확대와 동시에 문화적 다양성 수용의 기반을 넓힌다. 예) 외국인 노동자 지원 센터 내 기도실 제공, 병원 내 종교 상담 연계 서비스 복합 종교 공간의 실험: 미국, 캐나다, 독일 등에서는 다양한 종교가 함께 사용하는 예배 공간 ‘멀티페이스 센터’가 운영되며, 종교 간 ‘공존의 물리적 상징’을 제시한다. 4. 종교 정체성의 포용적 재정의 가능성 종교 정체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을 통해 변화하고 재구성될 수 있는 유동적인 개념이다. 다문화 사회에서는 자신의 신앙을 지키면서도 타인의 신념을 이해하고, 차이를 배려하는 능력이 새로운 종교적 성숙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이는 종교의 본질인 **‘자비’, ‘사랑’, ‘정의’, ‘관용’**의 정신과도 맞닿아 있다. 즉, 종교가 공존 사회의 걸림돌이 될지, 디딤돌이 될지는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확장적 시선으로 바라보느냐에 달려 있다.
신념은 다르되, 함께 살아갈 수 있다
다문화 사회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의 종교는, 이웃과 어떻게 함께할 수 있는가?” 종교는 자기만의 고유한 진리를 품고 있다. 하지만 그 진리는 타인을 배척하는 무기가 되어서는 안 되며, 서로 다른 이들이 만나는 자리에서 대화와 배려의 언어로 작동해야 한다. 앞으로 종교가 다문화 사회에서 건강하게 작동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방향이 요구된다: 종단 내부의 다문화 감수성 교육 강화 공공 정책에서 종교 다양성 반영 확대 청년세대 중심의 종교 간 문화 교류 프로그램 활성화 다문화 당사자의 종교 표현의 자유 보호 차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열린 신학/교리 해석 추구 종교적 정체성은 ‘내가 누구인가’를 말해주는 강력한 언어다. 그러나 그 언어가 다른 이들의 언어를 지워서는 안 되며, 오히려 서로를 들을 수 있는 공존의 번역기가 되어야 한다. 신은 하나일 수도 있고, 여러 모습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건, 그 신이 진정으로 원한 것은 인간이 서로 다름 속에서도 함께 살아가는 길을 찾는 것이 아닐까.